cloudspotter

껍데기가 그리도 중요한 사회 본문

투덜이 스머프

껍데기가 그리도 중요한 사회

단 단 2015. 3. 23. 00:00

 

 


영국 살면서 가장 편한 점 하나를 꼽으라면 여자인 나로서는 옷 걱정, 피부 걱정, 꾸미기 걱정을 안 해도 된다는 점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여기 사람들은 타인의 옷차림과 피부 상태, 외모 등에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영국 배우들 얼굴에 주근깨 덕지덕지, 주름 자글자글, 점도 안 빼고 사마귀도 그냥 두는 것을 영화 화면을 통해 많이들 보셨을 것이다. 배우는 그저 연기만 잘하면 된다고 생각들을 한다.

 

나는 박사 과정 마지막 단계인 구두 시험viva voci을 앞두고 잠깐 고민을 한 적이 있었다. 박사 구두 시험은 여기서도 매우 중요한 일이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 하면 질문에 대답을 잘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외에 옷 걱정을 따로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국에서처럼 면접관이나 시험관 앞에서 정장을 입어야 할지, 아니면, 중요한 일에도 정장을 잘 입지 않는 이곳 대학 사람들 관습대로 평소에 입던 옷을 입고 가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영국에서 내 전공 분야의 사람들은 특히 더 정장을 입지 않는다(예술 분야임). 박사학위를 받아 놓고도 인문·사회계나 이공계와 달라 이름 앞에 "박사" 타이틀이 붙는 것도 꺼린다. 자기 예술 인생의 굵직굵직한 획을 긋는 50세 회고전, 60세 회고전 같은 매우 중요한 행사에서도 이들은 정장을 입지 않는다. 심포지엄이나 세미나에서 중요한 발표를 맡았어도 양복 입고 나타나는 사람을 못 봤다.

 

한국의 상황은 다르다. 학사 때 전공 교수 한 분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 있다. "늬들 선배 ○○이 말이야, 그 녀석이 석사 지원 면접 때 양복도 안 입고 그냥 아무 옷이나 입고서는 덜렁덜렁 면접을 보러 왔더라고. 면접과 면접관들을 우습게 안 거지. 합격될 리가 있겠어?" 양복 안 입고 나타난 그 선배의 낙방이 떠올라 나로서는 한국 상황과 영국 상황을 비교해 옷을 어떻게 입고 구두 시험에 응해야 할지 고민이 되었다. 한국에서는 '얽매이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을 소유했으리라 믿어지는 예술가들조차도 타인의 차림새를 문제 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장고 끝에 정장을 입지 않기로 결정했다. 돈 없는 가난뱅이 학생답게 평소에 입고 다니는 평범한 옷을 입고 가기로 했고 대신 세수와 목욕을 평소보다 좀 더 빡빡 정성껏 했다. 그리고는 늘 하던 3분짜리 간단한 화장을 하고 갔다. 갔더니,

 

생각보다 편안한 분위기였고 심사위원들 꼴은 나보다 더 못했다. ㅋㅋㅋㅋㅋ (그래도 이 분야에선 꽤 이름 있는 사람들임.) 정장 입고 갔더라면 오히려 매우 어색하고 우스꽝스러운 분위기가 되었을 그런 자리였다. 참고로, 여기서는 박사 논문 심사를 위해 학생이 심사위원들에게 소위 '거마비'를 준비해 드리거나 식사 대접으로 심사위원들 기름칠해야 하는 관행이 없다. 내가 한국에서 다녔던 대학도 과 교수님들이 다들 선비 같은 분들이라 다행히 이런 관행은 없었는데, 한국의 누리터에는 이에 관해 고민하는 학생들의 이야기가 의외로 많이 나돈다. 아직도 이런 관행이 존재하는 대학이 있다니.

 

한국에서 학사와 석사를 할 때는 전공 특성상 독일에서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강사들이 많았다. 그런데 남자 강사든 여자 강사든, 한결같이 지독히도 후줄근한 차림에, 여자 강사들은 심지어 화장도 제대로 하지 않은 모습으로 강의실에 '출몰'해 학생들을 뜨악하게 하곤 했다. (유럽 유학생들은 이거 뭔 뜻인지 잘 알 것이다. 영국도 독일과 비슷한 분위기라 나도 지금 딱 그 꼴인데, 오죽하면 딸 보러 영국에 놀러 오신 권여사님이 딸 꼴을 보고는 심란해져 옷을 사 주고도 성에 안 차 입고 오신 옷까지 다 벗어 주고 가셨겠나.) 당시 내가 속한 단과대 안에는 전공 특성상 부잣집 딸내미들이 좀 많아 기똥찬 옷, 명품 가방, 하이힐로 치장한 삐까뻔쩍 광나는 학생들과, 후줄근하고 추레하기 짝이 없는 강사의 대조적인 모습은 흔한 것이었다. 수수하고 '착한' 학생이었던 나조차도 강사들의 그 후줄근함에 저으기 놀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여기 영국 와서 지내 보니 왜 유럽에서 공부한 강사들이 그 꼴인지가 이해되는 것이었다. 여기서는 상대방의 껍데기 상태를 별로 중요하게 생각지 않는다. 공부하는 사람은 그저 속만 알차면 된다. 외모는 본질이 아니다.

 

가뜩이나 치열한 한국 사회에 적응해야 할 걸 생각하면 겁이 나는데, 여기에 껍데기 걱정까지 더 얹어서 해야 하니 마음이 갑갑해진다. 귀국 후 가장 먼저 가야 할 곳은 아마도 피부과가 될 것 같다. (돈 모으고 있다.) 내가 가기 싫어도 권여사님이 끌고 갈 게 분명하다. 옛날보다 더 사정이 악화돼 이제 한국에서 여자들은 공장에서 찍어낸 흠없고 티없는 플라스틱 인형 같은 빤질빤질한 얼굴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가 되었다. ('물광'이 뭐요?) 내 아버지 장례식 때, 울어서 눈이 빨개져 있는 맨 얼굴의 나는 한 조문객 남자로부터 "피부 관리 좀 해야겠다." 소리를 듣고 넌더리를 냈다. 이 사회는 도대체 왜 이리도 남의 외모에 집착을 하는 걸까.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여자보다 남자들이 남의 외모에 지적질을 더 많이 해댄다. 남의 얼굴에 어쩌다 뾰루지 하나 난 것까지 꼭 짚고 넘어간다. 피부과 가서 거금 들여야만 '자기 관리 잘 하는 철저한 여자' 취급한다. 손주를 본 할머니들도 이제 내 인생을 찾겠다며 '주름 성형'을 하고, 노신사들도 검버섯 제거에 열심이다. 늙어서 이제는 속 걱정을 해야 할 사람들이 그 나이가 되도록 껍데기 걱정을 하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피곤한 사회다.

 

 

 

 

 

 

 

 "저, 머리 심거나 가발 쓰지 않습니다."

 

 

 

 

 

 

 

"저, 주근깨 안 뺍니다."

 

 

 

 

 

 

 

"저, 턱 안 깎습니다."

 

 

 

 

 

 

 


"저, 주름 성형 안 합니다."
(현재 영국 TV에서 가장 잘 나가는 여성 중 한 명.)

 

 

 

 

 

 

 


"저, 박피 안 합니다."
(우리 동네 나무 어르신 I)

 

 

 

 

 

 

 


"저, 보톡스 안 합니다."
(우리 동네 나무 어르신 II)

 

 


☞ 저는 포토샵 거부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