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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캠프 커피 Camp Coffee - 치커리 커피 에센스 Chicory Coffee Essence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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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캠프 커피 Camp Coffee - 치커리 커피 에센스 Chicory Coffee Essence

단 단 2016. 10. 12. 00:00

 

 



한 달에 한 번 마법에 걸릴 때면 저는 마법이 풀릴 때까지 카페인 섭취를 일절 금합니다. 쵸콜렛 한 조각도 안 먹습니다. 하루에 최소 두 잔씩 꼬박꼬박 마시던 밀크티를 못 마시니 마음이 그렇게 헛헛할 수가 없어요. 특히 요즘 같은 쌀쌀한 계절에는 마음까지 다 시립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커피가 몸에 맞지 않는 사람입니다. 기분상 그렇게 느끼는 게 아니라 정말 몸에 안 맞아요. 심장이 막 두근거려서 일에 오히려 집중을 할 수가 없고, 많이 마신 날은 손도 다 떨립니다. 목도 따가워지면서 신물도 올라옵니다. 얼마 전 신문에서도 커피와 안 맞는 유전자가 따로 있다는 기사가 났었죠. PDSS2 유전자의 발현률이 높은 사람, 쉽게 말해, 카페인에 매우 예민하고 효과를 오래 지속시키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 카페인 섭취를 무턱대고 해대면 심장에 무리를 줄 수 있다고 하죠. 홍차는 그래도 커피보다는 조금 낫습니다. 이것도 이제는 하루 네 잔에서 두 잔으로 줄였지만요. 마법에 걸릴 때는 카페인이 심장은 물론 아랫배까지 불편하게 하므로 커피든, 홍차든, 쵸콜렛이든, 입에 안 댑니다. 그럼 이 기간에는 대체음료로 무얼 마시느냐? 

 

카페인 없는 향초차herbal infusions를 마십니다. 그런데, 향초차는 아무리 질 좋고 향 좋은 걸 마셔도 기름진 느낌이 없으니 마음에 도무지 위로가 되질 않는 거예요. 그래서 최근에는 사진에 있는 걸 마시기 시작했지요. 저 자판기 커피 색 나는 음료는 무엇일까요?   

 

 

 

 

 

 

 

치커리 뿌리를 구워서 만든 커피 대용 에센스입니다. 따끈하게 데운 우유에 진한 흑갈색의 치커리 농축액을 타서 먹는 겁니다. 전세계에 이 치커리 커피 먹는 나라가 제법 있지요. 나폴레옹 전쟁 시절 부족한 커피 수입량을 메우기 위해 프랑스에서 개발되었고, 프랑스 식민지였던 루이지애나를 통해 미국에 건너가서는 남북전쟁 때 역시 부족한 커피 수입량을 메우기 위해 대량으로 소비되었으며, 영국에서는 1876년부터 '캠프 커피'라는 이름의 제품이 출시돼 간간히 소비되다가 2차 대전 때 전장에서 빨리 타 마실 수 있는 대용 커피로 요긴하게 쓰였습니다. 영국에서는 무카페인 음료로서뿐 아니라 케이크, 과자, 크림 등에 커피 맛을 내고 싶을 때도 이 캠프 커피를 많이 씁니다. 아이들도 먹을 수 있고 농축액이라서 쓰기가 편하거든요.

 

이건 유리병에 든 제품이고요,

 

 

 

 

 

 

 

 

같은 제품인데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서도 나옵니다. 수퍼마켓에는 이 제품이 더 많이 보입니다. 우유 한 잔을 전자 레인지에 데운 뒤 캠프 커피 한두 티스푼을 넣어 휘저으면 자판기 커피 색이 나면서 맛도 자판기 커피 비슷하게 나는데, 여기에 쌉쌀한 치커리 뿌리 맛이 희미하게 더해지죠. 커피 농축액이 소량 들기는 했으나 디카페인이라 몸에 영향을 미치지 않아 밤에도 안심하고 마십니다. 따끈하게 데운 우유를 바탕으로 삼기 때문에 기름지면서 포근하고, 고소하고, 살짝 유치하면서 꿈 같은 단맛이 납니다. 달아서 이 캠프 커피를 마실 때는 티푸드는 생략합니다. 

 

캠프 커피 성분:

sugar, water, chicory extract (25%), dried coffee extract (4%). 끝.

 

 

 

 

 

 

 

 

치커리 뿌리가 대용 커피로 변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제가 오늘 이 글에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습니다. 캠프 커피 용기 앞면을 확대했으니 그림을 유심히 보세요. 씨크Sikh교도로 보이는 인도 출신 군인과 스코틀랜드인으로 보이는 영국 군인이 나란히 앉아 찻잔에 든 음료를 즐기고 있죠. 전시에 진지에서 커피 대용으로 빨리 타 먹을 수 있는 이 캠프 커피를 마시고 있나 본데 ("READY AYE READY"라는 문구가 이를 뒷받침.) 인종이 다른 두 사나이가 이렇게 나란히 앉아 사이 좋게 담소 나누며 캠프 커피를 마신 지는 그리 오래되지가 않았습니다. 그 이전에는 그럼 어떤 그림이었느냐?

 

 

 

 

 

 

 

 

 

이런 그림이었습니다. 씨크교도가 옆에 서서 대기를 하고 있죠. 부대 내에서 계급이 아래이거나 개인 비서(완곡한 표현)라는 소리죠. 그렇죠, 시대가 변했으니 그림도 달라져야죠. 그런데 이 그림도 한 번 순화된 거라고 하네요. 그럼 1876년 출시될 당시의 그림은 어땠느냐?

 

 

 

 

 

 

 

 

이랬답니다. 하하, 이제 두 사람의 관계가 명확해졌죠.

 

 

 

 

 

 

 

 


그러니까, 빅토리안 시대에 출시되어 지금까지 포장 그림이 이렇게 변해 왔다는 거지요. 식품 포장을 통해서도 역사의 단면과 사회 변화를 엿볼 수 있어 재미있습니다. (바닥에 있던 무시무시한 칼Scottish broadsword도 없어지고, 두 남자가 심지어 서로 눈웃음까지 교환;;)   


영국은 씨크교도들에게 신세를 많이 졌습니다. 세포이 항쟁 때도, 두 번의 세계 대전 때도, 씨크교도들이 영국을 도와 피를 많이 흘렸지요. 영국 최고의 무공훈장인 빅토리아 크로스를 받은 이들이 많습니다.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영국에서 씨크교도들은 여전히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들로 칭송 받습니다. 충직하고 용맹한 전사 이미지가 있어 특히 경호원 직에 많이 채용이 됩니다. 저희 동네 길거리에서도 터번dastaar 쓴 굳건해 보이는 남자들을 자주 봅니다. 씨크교도들은 어쩐지 할아버지들도 다들 눈이 부리부리하면서 용맹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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