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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거세한 수소 씹다가 파리넬리 생각에 울컥

단 단 2019. 11. 23. 01:47

 

 

 

 

고깃집 가기 꺼리는데 어쩌다 휩쓸려 고깃집에 가 앉게 된 단단.

모임의 최연장자께서 한턱 내셨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후우... 

그런데... 


비싼 한우 취급하면 뭐 하냐고요.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추구하느라 환기 시설이 형편없어 저 이날 이 집에서 기름안개 잔뜩 들이켜며 고기 먹고 나서 호흡기 질환으로 무려 2주나 앓아 누웠던걸요. 나가서 돈 벌어야 하는데 꼼짝도 못 했으니 생계에 막대한 피해를 입었죠. 식탁 위에 미세한 기름 방울들이 빼곡이 덮이길래 내 안 그래도 밥 먹으면서 불안했습니다. 눈 앞에 시뻘건 남의 생살을 두고 식사한다는 것도 정서적으로 여간 힘든 일이 아니고요. 게다가 한 끼에 이토록 많은 양의 살을 먹게 하다니요. 

☞ 인간과 식량

☞ 한강 <채식주의자> 영문판

 

참, 

얼마 전에야 안 사실인데,

한우 수소는 공격적인 행동을 줄이고 육질을 개선하기 위해 생후 6-7개월에 거세를 한다면서요?;; 

☞ 한우 송아지 거세 방법과 거세의 효과 (장단점) 

☞ 국가가 수소 거세비육을 장려하는 이유

 

기침해 가며 억지로 고기를 먹고 앉았으니 오만 생각이 듭니다. 

 

한우 암소면 업소 측에서 나팔을 있는 대로 불어 댔을 텐데 한 마디도 없는 걸 보니 이거 수소 고기란 소리지. 고급 고깃집용 수소라면 거세를 해서 키웠을 게 분명해.

 

가만, 

'거세'가 영어로 '카스트레이션castration'이잖나, 

동사는 '카스트레이트castrate'이고.

 

잠깐, 

바로크 시대(c.1600-c.1750) 때 오페라에서 고음 배역을 맡았던 남성 가수를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불렀잖나!


으악, 

그러고 보니, 그 카스트라토가 이 카스트레이트와 같은 어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니 갑자기 어릴 때 본 영화 <파리넬리Farineli>(1994)가 떠오르면서 짠한 마음에 고기와 함께 실체 없는 큼직한 럼프lump가 목에 걸립니다. 좀 더 고상한 명칭으로 부를 수도 있으련만 '거세남'이라니, 세상에. 


파리넬리는 실존 인물이었고, 당시 고아나 가난한 집 남자 아이들이 어른들 욕심에 많이 희생되었죠. 그렇게 해서 크게 성공하면 다행이나, 운이 좋은 이는 극소수였고 대개는 조롱 속에 비참하게 살다 생을 마쳤습니다. 이게 다 교회 때문이고요. 집에 가지고 있는 음악책의 한 구절을 옮겨 적어 봅니다. [  ] 안의 글은 제가 추가한 겁니다.


"카스트라토는 소년의 목소리를 유지하기 위해 거세한 남성 성악가를 말한다. 사춘기 이전에 거세를 하면 테스토스테론과 같은 남성호르몬의 분비가 억제되어 후두가 성장하지 않기 때문에 남성의 목소리가 굵고 낮게 변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게다가 여성적인 특징도 나타나 흉곽이 확장되면서 일반인보다 비정상적으로 큰 폐를 갖게 되기 때문에 호흡이 길고 호흡의 조절을 기민하게 할 수 있었다. 카스트라토가 나타난 것은 가톨릭교회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이다. 원래 초대교회에서는 남녀가 동등하게 노래했지만, 유럽에서 기독교의 세력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타종교와 구별하기 위해 정신을 존중하고 육체를 경멸하는 사상이 강조되던 가운데 인간의 성적욕구에 대해 노이로제에 가까운 불신이 생겼고, 여성의 목소리가 성적욕구를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이유로 교회에서 여성이 노래하는 것도 금지되었던 것이다. [이전 글 ☞ 콘스탄티노플의 카시아가 작곡한 비잔틴 성가를 듣고 있노라면 어느 정도 이해는 갑니다. 우리 여자들 목소리, 어떤 땐 지나치게 매혹적이잖아요? 만일 근처 수도원의 남성 수사들이 이런 목소리를 들으면 싱숭생숭, 밤에 잠 못 자고 얼마나 전전반측 했겠어요. 그러니 수사 따로, 수녀 따로 모여서 신앙생활을 했던 거겠죠.] 


처음에는 여성이 내던 높은 성부를 소년이 부르거나 남자 성인이 가성(팔세토, falsetto)으로 불렀으나 소년은 성가대에서 훈련이 될 만하면 변성기가 되어 새로운 어린 단원으로 교체해야 했고 팔세토는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소리이기 때문에 내기도 힘들 뿐 아니라 아름답지도 못했다. 카스트라토가 더 인위적으로 인간의 몸을 변형시킨 것인데도 사람들은 역설적으로 팔세토보다 카스트라토의 목소리를 더 자연스럽고 진실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카스트라토의 존재를 필요로 했던 곳은 교회지만 정작 그들은 교회보다 오페라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오페라에 카스트라토들이 등장하게 된 것은 교황 식스토 5세가 여성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금지했기 때문인데, 이렇게 여성을 대신해서 노래해야 할 카스트라토들이 실제로 오페라에서 맡았던 배역은 대부분 남성 주역이었다. [당시의 오페라는 남성 배역에도 높은 음역대의 노래를 안배했기 때문입니다. 카스트라토의 전성기는 대략 1650년부터 바흐가 죽은 해인 1750년까지이며, 1903년이 되어서야 금지가 됩니다. 여성의 역할을 제한하면 이렇게 남성이 고생하는 겁니다.]" 

 

- 민은기 외 <서양음악사> 음악세계, 2014년.



 

 

 

 

 

 

신교인 성공회든, 구교인 로마 가톨릭교회든, 영국의 교회들은 아직도 소년 성가대chorister 제도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가 꼬마들이 기특하다며 이 블로그에서 몇 번이나 코리스터 소개를 했었죠. 변성기가 되면 하루아침에 명예로운 '직장'을 잃게 되는 건데, 세월이 흐를수록 아이들 발육 상태가 좋아져 변성기가 점점 더 일찍 찾아오고, 단원 교체가 잦아져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다고 하네요. 바흐(1685-1750)가 활동하던 시기에는 만18세 정도에 소년들이 변성기를 맞았다는데 요즘은 만13세 이전으로 연령이 한참 내려왔습니다. 


영국의 코리스터 제도는 무려 140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1400년대에 이 제도가 생겼다는 게 아니라 1400년이 넘는 전통이니 7세기경부터 있었다는 소리입니다. (가톨릭교회는 이보다 더 오래되었고,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유대교에서 비롯되었다고 합니다.) 영국의 음대에는 코리스터 출신들이 많습니다. 꼬마 때부터 라틴어 줄줄 읊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 최상급의 노래들로 '공연'을 해댔던 이들이라 음악적 내공에 있어 저 같은 보통 사람은 상대가 안 됩니다.

 

 

 

 

 

 

 

 

 

영화 <파리넬리>의 한 장면입니다. 주인공이 오페라 아리아를 부르면서 끔찍했던 어린 시절을 회상하며 회한에 젖는 대목입니다. 이 시절 작곡가들은 오페라 아리아를 쓸 때 일부러 멜로디를 느리고 단순하게 썼는데, 이는 카스트라토가 재량껏 자기 기량을 뽐낼 여지를 주기 위해서입니다. 가수가 즉흥적으로 멜로디를 바꿔 부르는 게 가능했죠. 위의 영상에서도 멜로디를 반복할 때 파리넬리가 장식음을 추가하고 음도 한껏 높여서 부릅니다. 헨델의 오페라 <리날도Rinaldo> 중 '울게 하소서'입니다.

 

 

[이태리어 가사의 영어 번역]


"Let me weep over

my cruel fate,

and let me sigh for

liberty.

 

May sorrow shatter

these chains,

for my torments

just out of pity."

 

 

오늘날에는 더이상 카스트라토를 볼 수 없지요. 

그런데 여성의 음역대에서 노래하는 남성 가수들은 지금도 있습니다. 네에, 가성으로 노래하는 '카운터테너'를 말합니다. 저는 카운터테너의 두텁고 부드럽고 기름진 목소리를 좋아합니다. 여성의 목소리와는 또 다른 매력이 있는데, 카운터테너 안에서도 소프라노와 알토가 또 갈린다고 하죠.

 

 

 

 

 

 

 

 

위의 영상은 영국의 카운터테너 이스틴 데이비스(Iestyn Davies, 1979- )의 헨델 <성스러운 빛의 영원한 원천Eternal Source of Light Divine> 연주입니다. 이스틴 데이비스도 코리스터 출신입니다. 고음의 트럼펫 소리도 좋죠? 바로크 시대에는 인성과 트럼펫, 혹은 오르간과 트럼펫을 같이 쓰는 관행이 있었습니다. 트럼펫 연주자도 영국인입니다. 복잡한 밸브 달린 현대 트럼펫이 아니라 바로크 시대의 내추럴 트럼펫이라서 모양이 많이 다르고 연주하기가 까다롭죠. 헨델(1685-1759)은 독일 출신의 이태리풍 영국 작곡가입니다. 으응? 헨델은 참 우아하고 유려한 선율을 잘 쓰고 잘 선택해 다듬는 것 같아요. 오늘 걸어 드린 세 곡 모두 제가 좋아하는 헨델의 선율들입니다. 

 

참고로, 옛 시절 작곡가들은 큰 곡을 만들 때 자기가 새로 창작한 선율만 넣지 않고 타 작곡가가 쓴 선율을 가져다 손봐서 쓰기도 했습니다. 바흐 작품에도 남의 선율이 수두룩하죠. 오늘날의 창작 환경 및 기준과는 조금 다른 상황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두시면 좋겠습니다. 

 

[오리지날 영어 가사]

 

"Eternal source of light divine

With double warmth thy beams display

And with distinguish'd glory shine

To add a lustre to this day."

 

 

 

 

 

 

 

영국 스튜어트 왕조의 마지막 군주인 안Anne 여왕. 1702-1714년 재위.

재위 말년은 헨델이 영국에서 활동을 시작했던 시기와 겹친다.

<포트넘 앤드 메이슨> 식료품점도 안 여왕 시대에 생겼다.

 

위의 <성스러운 빛의 영원한 원천>은 헨델이 영국에서 활동하면서 안 여왕을 위해 쓴 곡입니다. 영국의 선배 작곡가 퍼셀(Henry Purcell, 1659-1695)의 관행을 따라 군주의 생일이나 중요한 국가적 행사에 찬가ode를 써서 헌정했죠. 


기웃이: 안 여왕? <포트넘 앤드 메이슨> 홍차 가게에 있는 그 '퀸 앤 블렌드'의?


네에, 그 안 여왕이요. 앞으로는 '퀸 안 블렌드'로 밀크티 만들어 드실 때 이 곡을 틀어 놓으세요. 기왕이면 여성 목소리말고 카운터테너의 목소리로 들으시고요. '오늘'을 축하하는 노래라서 영국에서는 결혼식에도 이 노래를 많이 연주합니다. 해리 왕자와 마클 양의 결혼식에서도 연주됐었죠.

 

 

 

 

 

 

 

 

맛본 지 오래돼 '퀸 안 블렌드' 홍차 맛을 까먹은 단단.

영감이 신세계 백화점에서 한 통 사다 줌.





 

 

 

이번에는 독일의 카운터테너 안드레아스 숄(1967- )의 헨델 연주.

숄 역시 코리스터 출신.

오페라 <세르세> 중 '그 어디에도 없을 나무 그늘이여'.
나무에 관한 노래 중 이토록 고상한 선율은 또 없을 듯.
거세 안 해도 목소리 이렇게 아름답기만 한 것을.




[이태리어 가사의 영어 번역]

 

"Tender and beautiful fronds

of my beloved plane tree,

let Fate smile upon you.

May thunder, lightning, and storms

never disturb your dear peace,

nor may you by blowing winds be profaned.


Never was a shade

of any plant

dearer and more lovely,

or more swe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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