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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나 한 잔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어케 보냈느냐면

단 단 2014. 12. 31. 23:30

 

 

 

 

 

2014년의 마지막 날입니다. 일년 하루하루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하나뿐인 특별한 날이긴 하지만 한 해의 마지막 날은 감회가 남다릅니다. 오늘 하루는 마치 내일 죽을 사람처럼 물건 정리도 좀 하고 한 해를 곰곰이 돌아보며 묵상을 해야겠다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최선을 다해 맛난 음식 먹어야지요. 독일의 슈톨렌을 사 왔습니다. 대개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이런 크리스마스 음식들이 떨이로 쏟아져 나오기 마련인데, 영국에서 슈톨렌이 하도 인기 있다 보니 올해는 떨이를 하지 않을 모양입니다. 이제나저제나 값이 내려갈까 기다리다가, 동날까봐 걱정돼 그냥 제값 다 주고 사 왔습니다. 영국이 자랑하는 괴짜 셰프 헤스톤 블루멘쏠이 맛낸 슈톨렌입니다. 프랑스 브리오쉬 반죽에, 영국 민스미트에, 이태리풍 오렌지맛 설탕에, 얼그레이 홍차 맛을 가미했습니다. 독일 슈톨렌에 프랑스, 영국, 이태리의 맛을 입힌 거죠. 다분히 헤스톤스럽죠? 값도 비쌌어요. 무려 7파운드나 주고 샀습니다. 우리돈으로 약 1만2천원 정도입니다.

 

 

 

 

 

 

 



독일음식이니 아끼는 독일 접시에 담아야지요. 최대한 얇게 썰어 먹어야 된다고 해서 최선을 다해 얇게 썰었습니다. 찻잔에는 홍차 대신 크리스마스 향신료로 맛낸 빠알간 루이보스를 우려 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는 첫 장[위 사진] 찍고 요리조리 몸을 움직여 가며 좋은 구도를 모색하는데, 육중한 몸으로 의자 하나를 툭 건드려 의자 두 개 사이에 걸쳐 놓았던
저 하얀 널빤지가, 널빤지가, 널빤지가 그만;;


우르르 
와장창 쨍그랑!


찻잔 2조 모두 깨지고,

초 켜서 담아둔 티라이트 홀더 박살나고,

빠알간 찻물 카펫에 다 쏟아지고,

촛농 사방에 흩어지고,

큰맘 먹고 산 비싼 슈톨렌은 맛도 못 보고 찻물과 촛농에 젖고,

표면엔 깨진 유리 파편들이 파바박,

심지어 신고 있던 슬리퍼까지 다 젖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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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시간에 일어난 일이라 정신이 아득해져
무얼 어떻게 먼저 처리해야 할지 몰라 한참을 멍 때리며 바라만 보다가

사글세 사는 신세라 카펫 교체비 안 물어내려면 얼른 카펫부터 살려야겠다 싶어

깨진 유리 조각과 도자기 조각 조심조심 주워 담고,

흠뻑 젖은 슈톨렌 통째로 휴지통에 버리고, (흑흑;;)

청소기 돌려 파편 가루 빨아들이고,

수건과 키친 타월 가져다 카펫이 머금은 찻물 한 시간 동안 눌러 빼 내고,
가죽 의자와 주변에 튄 찻물 닦고,
사방에 튀어서 굳은 촛농 제거하고,
싸구려 슬리퍼는 젖고 나니 본드 붙인 곳이 다 떨어져 새로 사 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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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소중한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후를 이렇게 보냈습니다.

 

 

 

 

 

 

 

 

위로가 필요하다.

 



☞ 찻잔 새로 들인 날 회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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