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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아노의 날에 내 피아노를 생각하다 World Piano Day 본문

음악

피아노의 날에 내 피아노를 생각하다 World Piano Day

단 단 2023. 3. 29. 23:35

 

 

 

강의실 가는 길에 주운 솔방울. 2023년 봄.

 

 

 

예수 믿기 전에는 점집 뻔질나게 드나들며 마귀 종노릇하던 권여사님.

아직 국민학교도 입학하지 않은 딸래미 손 잡고 미래를 점쳐 달라며 점쟁이 앞에 데려가 앉혔더니 점쟁이 하는 말이

"이 아이는 무언가 소리 나는 걸 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이야!"

 

지금 용어로 풀이하면, 넘치는 리비도libido를 주체 못해 패가망신 할 수 있으니 소리 나는 무언가를 시켜 발산할 통로를 마련해 줘야 한다, 뭐 이런 이야기. (점쟁이를 통해 역사하신 오 주님 찬양)  

 

아직 한글도 모를 때였는데 그 길로 곧장 동네 피아노 학원에 등록 당했고, 다행히 피아노 치는 일이 내겐 그 어떤 놀이보다 재미있어 학원 가는 시간을 고대하게 되었다.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도 피아노 교습은 꾸준히 이어졌는데, 갈수록 흥미가 더 붙어 학원에서만 잠깐 칠 수 있는 환경이 슬슬 답답해졌다. 피아노를 갖고 싶다고 부모님께 몇 번이나 소망을 피력해 보았으나 번번이 묵살되었다.

 

국민학교 2학년. 이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더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 싶어 아침마다 영감님 구두를 닦기 시작했다. 물건과 노동의 가치에 대한 감각이 전무한 꼬맹이였으므로 피아노 값이 집 값만큼 비싼 줄 알았고, 한 일년 구두를 닦으면 얼추 그 값에 이를 줄 알았다. 비싼 물건을 그냥 사 달라는 건 어린 단단 생각에도 염치없는 일이었고, 위로 오빠가 셋이나 있었으므로 막내 혼자 특혜를 입는 건 형평에 맞지 않아 물건 값에 해당하는 노동을 제공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게 1년 넘게 구두를 닦던 국민학교 3학년 어느 날, 방과후 집에 돌아왔더니 방에 반짝이는 검은색 <영창> 업라이트 피아노가 놓여 있었다. 그날 기쁨에 겨워 해질 때까지 몇 시간이고 '내' 피아노에 앉아 쳤던 곡은 이 곡.

 

 

 

 

 

 

 

 

 

국민학교 5학년이 되어서도 꾸준히 피아노 학원을 다녔는데, 집에 피아노가 있어서 그랬는지 빠른 속도로 실력이 늘어 이제는 J. S. 바흐의 복잡한 모방기법 작품들을 자발적으로 익히는 데 재미를 들이게 되었다. "오늘은 이 곡을 치고 싶어요." 학원에 도착하면 선생님께 악보를 펼쳐 그날 치고 싶은 곡을 골라 알려드렸고, 세 시간 정도 연필로 핑거링 적어 가며 진지하게 익힌 뒤에는 레슨을 통해 어느 부분을 어떻게 더 연습할지 듣고 집에 돌아왔다. 맹렬하게 연습해 2-3일에 <인벤션>, <신포니아>를 한 곡씩 '마스터'해 나가는 게 당시의 내 계획이었다.

 

이때 쳤던 곡들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째깍째깍' 시계를 연상케 하는 아래의 곡. (실제로 바로크 시대인 1656년에 진자시계가 발명되어 복잡하게 얽힌 기계의 작동, 톱니바퀴의 상호작용, 운동과 중력의 법칙, 시간의 차원 등이 작곡가들의 음악과 시간에 관한 생각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 결과 반복, 모방, 견고한 박동pulse, beat을 따르는 규칙성 등이 점차 바로크 음악의 특징이 되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단조로 된 복잡한 짜임새texture의 3성부 <신포니아> 9번을 칠 차례가 되었는데,

 

 

 

 

 

 

 

 

 

반음계와 증·감음정으로 된 얽히고설키는 선율 때문인지 국민학교 5학년짜리한테는 이전에 느껴 보지 못했던 심오한 영적, 정신적 세계가 열리는 듯했고, 이때 비로소 음악을 내 평생의 직업으로 삼아야겠다는 결심을 하게 되었다. 날이 저물어 연습실이 컴컴해지는 줄도 모르고 얼마나 몰두해 쳤던지. 지금도 이날의 기억이 생생하다. 말하자면, 바흐의 이 곡이 나에게는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 같은 것. (대학생이 되어서야 이 곡이 피아노로 치는 '수난곡passion'임을 알게 되었다.)

 

국민학교 6학년. 예중에 진학해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하자 영감님이 펄쩍 뛰었다. "모녀가 학원 선생의 감언이설에 놀아나 음악 하는 게 얼마나 힘든 줄도 모르고 함부로 뛰어들어!" 처음으로 피아노 학원 가는 게 금지돼 밤 늦게까지 학원에서 연습하고 돌아오면 악보가방을 개집 뒤에 숨기고 친구 집에서 놀다 온 척 해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전업 주부인 권여사님이 딸의 피아노 학원비를 어떻게 마련했는지 놀랍고 감사할 뿐이다. 

 

입시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에 딸이 몰래 예중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된 영감님이 피아노 학원에 들이닥쳐 단단을 '납치'해서는 지인인 음대 교수에게로 끌고 갔다. 예고 없이 갑자기 평가 받게 해 "예중에 갈 실력은 안 되네." 소리 듣고 그만 두게 하려는 심산이었다. 세상 어느 아빠가 이렇게 못됐을까? 

 

분노가 일었으나 지금 이 순간이 내 미래를 결정할 것이므로 정신 바짝 차리고 차분하게 쳐 나갔다. 그랬더니 연주를 들은 교수, "왜 B예중을 준비하고 있었지? A예중을 가지 않고?" 더 좋은 학교로 갈 것을 독려한다. 만세, 내가 이겼다. 급하게 A예중 곡으로 바꿔 입시를 준비했고 다행히 합격했다. 그 뒤로는 딸이 음악 하는 걸 반대하지 않았지만 대학과 대학원 학비는 여전히 장학금이나 내가 번 돈으로 해결했다. 

 

내가 애를 키워 보지 않아서 잘은 모르겠다만, 자녀가 그 나라에서 최고 명문 예중, 예고, 음대에 진학하면 대견해하고 기뻐하는 게 부모의 마음 아닌가? 자녀가 조금이라도 재능을 보이고 그 일을 좋아하면 형편 닿는 한 최선을 다해 지원해 주는 게 부모의 역할 아니었나? 중고교, 대학을 다니는 동안 친구들 다 갖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나만 갖지 못 했다. 심지어 내가 레슨하는 여염집 입시생 아이들도 갖고 있던 그랜드 피아노를 선생인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업라이트 피아노도 1년 넘게 구두 닦아 겨우 얻어 냈는데 그랜드 피아노를 사 줄 리 만무, 대학원 다니며 부지런히 레슨해 번 돈으로 장만했고, 애지중지 닦고 쓰다듬으며 잘 쓰다가 유학 가면서 처분했다. 지금은 비좁은 공통주택에 살아 디지털 마스터 키보드에 별도로 구매한 명기 음원을 물려 쓰고 있다. 그랜드 피아노는 강의하는 날 빈 강의실에서나 만진다. 울림 좋은 큰 강의실에서 내가 쓴 곡을 그랜드 피아노에 앉아 치고 있으면 아직도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행복한데 죽기 전 다시 집에 들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집부터 넓혀야겠지.

 

40대 중반의 어느 젊은 아빠가 전공생도 아닌 취미로 피아노 치는 아들을 위해 몇날 며칠 공부해 가며 어쿠스틱 피아노와 신서사이저를 고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도대체 내 아버지는 능력이 되면서도 왜 그토록 자녀 양육과 뒷바라지에 인색하고 소홀했는지 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재능과 근성을 물려주었으니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여겼던 걸까.

 

 

 

피아노의 날에 리스트(Franz Listz)를 생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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