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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유청버터를 얹은 핫크로스번 Hot Cross Buns & Whey Butter 본문
홋 크로스 번 이야기
소포요~
소포 모양을 닮은 영국의 전통 빵 홋 크로스 번.
향신료와 꼬들꼬들 말린 과일들이 듬뿍 들어가는 고급 빵입니다. 빵 위에 십자가가 그어져 있어 누구든지 대번 알아볼 수 있습니다. 지금이야 향신료와 말린 과일 따위는 흔한 것이 되었지만 옛 시절엔 마치 오늘날의 트러플, 사프론, 캐비아와 같은 귀한 재료였지요. 그러니 서민들은 명절에나 겨우 먹어볼 수 있었던 음식입니다. 영국에서는 부활절 직전 금요일인 성 금요일Good Friday에 이 홋 크로스 번을 먹습니다. 이 시장이 아주 큽니다. 수퍼마켓들마다 심혈을 기울여 구워 내고, 신문과 잡지들은 성 금요일이 되기 한참 전부터 올해는 어느 수퍼마켓, 어느 티룸의 홋 크로스 번이 가장 맛있는지 일일이 맛을 보고 점수를 매겨 적나라하게 공개를 합니다. 가차없어요. (영국에서는 A사, B사, 이딴 이니셜 처리는 블라인드 테스트 할 때나 합니다.)
쵸콜렛이나 퍼지fudge를 박은 변종들도 맛있게 잘 나오기는 하는데, 그래도 홋 크로스 번 하면 뭐니뭐니 해도 건과일과 향신료가 든 원조가 으뜸이지요. 다쓰 부처 입맛엔 원조가 가장 맛있습니다. 저 십자가 때문에 기독교 색채가 짙은 빵으로 인식들을 하는데요, 십자 표시는 영국에 기독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쓰이고 있었다고 합니다. 십자를 그어 생긴 네 개의 구획이 사계절을 뜻했다고 하네요. 그러다가 기독교적 상징으로 점차 변했다고 하지요.
영국에서는 대개 이렇게 네 개 한 묶음으로 팔고 낱개로는 여간해서 팔지 않습니다. 네 개가 서로 붙어 있어 하나씩 떼면 부드럽고 촉촉한 옆면을 볼 수 있는데, 영국인들은 이 촉촉한 옆면을 좋아해서 번을 낱개로 굽지 않고 이렇게 다닥다닥 붙여서 굽는 습관이 있습니다. 첼시 번도 이렇게 굽지요.
☞ 첼시 번의 모습
올해는 <막스 앤드 스펜서Marks & Spencer> 제품으로 샀습니다. 아니? 집에서 3분 거리에 있다는 <웨이트로즈Waitrose>에 안 가고? 영국인들이 영국 최고의 수퍼마켓으로 여기는 웨이트로즈. 웨이트로즈가 들어서면 그 동네 집값이 다 오를 정도죠. 그래도 간편식ready meal이나 티푸드 등 간식거리는 막스 앤드 스펜서 제품들이 월등히 낫습니다. 그래서 일년에 단 한 번 먹는 절기 음식인 홋 크로스 번을 사러 다쓰베이더가 고생을 마다않고 버스 타고 막스 앤드 스펜서까지 다녀왔습니다. (치즈는 그래도 웨이트로즈가 으뜸.)
이 제품입니다. 신문사들이 최고로 꼽은 제품은 아니었지만 다쓰 부처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신문사들이나 전문가들이 꼽은 최고가 저희 입맛에 꼭 최고로 맛있는 건 아니더라고요. <막스 앤드 스펜서> 것말고도 <세인즈버리즈>와 <웨이트로즈> 것도 여러 개 맛보았는데 <세인즈버리즈>의 최고급 제품군인 'Taste the Difference' 번도 맛 괜찮았습니다.
홋 크로스 번 맛있게 먹는 법
번을 반으로 갈라 토스터에 굽거나 오븐의 그릴 기능을 이용해 살짝 구우세요. 그런 다음 냉장고에서 막 꺼낸 차갑고 단단한 버터를 최소 3mm 두께로 두껍게 저며 척 얹으세요. 바삭한 표면과 탄력 있는 속살의 뜨거운 번, 그리고 아이스크림처럼 부드럽고 차가운 버터. 식감 대비와 온도 대비를 한껏 즐기면서 먹는 거지요. 얼마나 맛있는데요. 버터를 슥슥 얇게 펴바르거나 뜨거운 번 위에서 녹게 내버려두면 안 됩니다. 맛이 완전히 달라요.
유청 버터 이야기
첫 사진을 다시 가져왔습니다. 이번에는 뒤에 있는 버터를 유심히 보세요. 저게 치즈 생산이 활발한 잉글랜드 남서부와 북서부에서 주로 생산되는 '유청 버터whey butter'라는 건데요, 우리가 아는 버터와는 좀 다릅니다. 우리가 아는 버터는 발효 풍미가 안 난다고 해서 소위 '스윗 크림 버터sweet cream butter'라 부르고, 공장에서 기계 설비를 이용해 살균 우유에서 크림을 단시간에 분리한 뒤 고속 회전시켜 만들지요. 집에서도 비슷하게 흉내 낼 수 있어요. 생크림을 사다가 푸드 프로세서에 넣고 한참 돌려주면 즉석 버터가 돼서 나오는 거, 많이들 보셨을 겁니다. 요리사들도 종종 가정 요리 레서피에 소개를 하곤 하는데, "내가 만든 버터야." 손님들에게 으스댈 수 있어 좋지요. 공장제 스윗 크림 버터는 우유 풍미가 고스란히 나면서 질감이 매끄럽고 기름집니다. 맛이 중립적이라 무난하게 쓸 수 있습니다. 한편, 프랑스 에쉬레Échiré 버터나 이지니Isigny 버터 같은 컬처를 넣어 발효시킨 버터는 '발효 버터cultured butter'라고 부르는데, 독특한 발효 풍미가 나서 애호가가 많지요. 저도 좋아합니다. 유청 버터와는 다른 겁니다.
팜하우스 버터
장시간에 걸쳐 발효한 크림을 가지고 열이 발생하지 않도록 소량씩 천천히 저어churn 만든 '팜하우스farmhouse 버터'는 값을 좀 더 쳐줍니다. 전통식이죠.
사진에 있는 유청 버터는 치즈 만들 때 생기는 유청whey을 가지고 소량씩 수작업해 만듭니다. 치즈 만드는 초기 단계에 이런저런 미생물과 응고 효소를 우유에 넣고 기다리면 순두부처럼 몽글몽글 응유curd가 생기고 멀건 물인 유청과 분리가 되는데, 그 유청을 버리지 않고 따로 모아 유청에 있는 지방 성분으로 버터를 만드는 겁니다. 이렇게 만든 버터는 사진상으로도 확인할 수 있듯 일반 버터에 비해 윤기가 좀 덜 돌긴 하나 치즈 풍미가 살짝 돌고 산미가 나서 얼마나 맛있는지 모릅니다. 값은 일반 버터보다 좀 비싸긴 한데, 저는 베이킹에 쓰는 버터말고 그냥 먹는 테이블 버터는 꼭 이 유청 버터로 씁니다. 어떤 치즈를 만들 때 나온 유청이냐에 따라 버터 풍미도 달라진다는 것이 애호가들한테는 큰 매력으로 작용합니다. 그 맛을 아는 사람들은 구운 빵 위에 얹어 먹는 버터로 이 유청 버터만 고집한다고 하지요.
웨이 버터 ⊂ 팜하우스 버터, 팜하우스 버터 ≠ 웨이 버터
영국에서는 이 유청 버터를 '웨이 버터' 혹은 '팜하우스 버터'라고 부르는데, 다른 나라에서는 어떻게 부르는지 모르겠네요. 주의할 것은, 웨이 버터라 써 있는 것들은 웨이 버터가 맞지만, 팜하우스 버터라 써 있는 것들에는 유청이 아닌 일반 유크림을 갖고 만드는 것들이 더 많아서 포장의 문구를 좀 더 꼼꼼히 읽어봐야 한다는 겁니다. 웨이 버터는 팜하우스 버터에 속하지만 팜하우스 버터에 웨이 버터만 있는 건 아니라는 거지요. 일단 'farmhouse butter'라 써 있는 것을 고른 뒤 포장 어딘가에 'whey'라는 단어가 있는지 잘 찾아보시면 됩니다.
치즈 농가라고 해서 다 이 유청 버터를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치즈 장인이 곁다리로 유청 버터도 손쉽게 뚝딱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유청 버터도 별도의 장인을 필요로 합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하고 손이 많이 가는 데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장인 수도 많지 않고 생산량이 적어 시장에서 흔히 볼 수도 없어요. 전통 방식으로 치즈를 생산하는 농가에서나 가능하지 대량생산하는 치즈 공장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입니다. 무염일 경우는 유통기한이 너무 짧기 때문에 대개는 가염된 것으로 수퍼마켓 선반에 극소량 놓여 있습니다. 영국에 계신 분들은 장볼 때 버터 선반을 눈여겨보셨다가 이 유청 버터를 발견하시면 한 번쯤은 사서 맛보실 것을 권합니다. 전통 방식으로 작업하는 치즈 농가들이 많은 나라에서나 겨우 맛볼 수 있는 버터입니다.
홋 크로스 번에 단맛이 돌기 때문에 저는 가염 유청 버터로 얹어 먹습니다. 소금기가 단맛과 향신료 기운을 더욱 북돋아 정말 맛있어집니다. 테이블 버터로 추천합니다. 영국 버터 중 저지Jersey 버터, 건지Guernsey 버터, 염소젖 버터는 따로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 작년과 재작년의 홋 크로스 번 사진.
반 가른 것은 헤스톤 블루멘쏠 제품.
역시 유청 버터를 얹었음.
▲ 쫀득한 크럼핏crumpet에 얹어 먹어도 기가 막혀.
▲ 오리 모양 버터 접시 본 김에,
며칠 전에 찍은 오리 사진 한 장.
꼬맹이 표정과 손 모양, 정말 귀여워.
▲ 영국의 부활절 꽃 수선화daffodill. 온 동네가 수선화 천지.
☞ 영국음식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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