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oudspotter
[런던여행] 세인트 판크라스 역 길버트 스콧 레스토랑 The Gilbert Scott Restaurant, St Pancras Stn 본문
[런던여행] 세인트 판크라스 역 길버트 스콧 레스토랑 The Gilbert Scott Restaurant, St Pancras Stn
단 단 2017. 5. 31. 00:00
- 2017년 2월 26일에 있었던 일을 적습니다 -
휴...
저는 이 건물이 왜 이렇게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영국과 벨기에를 잇는 유로스타 역인 이 세인트 판크라스 역사 앞에만 서면 건물이 세워졌던 19세기 빅토리아 시대의 문학 작품들과 당대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 그에 얽힌 얼굴들과 어록들이 공기 중에 이미지와 활자로 와글와글 찹니다. 건물 자체도 아름다운 데다, 먼길 떠나는 사람들을 위한 철도역이 지닌 묘한 기운이란 게 있지요. 첨단 이미지의 공항과는 또 다른 좀 더 예스러우면서 아날로그한 느낌.
세인트 판크라스 역사 안에는 고급 호텔이 있습니다[St Pancras Renaissance Hotel]. 고급 호텔이 있으면 고급 바와 고급 식당도 있게 마련. 근사한 인테리어의 ☞ <길버트 스콧 바>는 지난 번에 소개를 해 드렸고, 오늘은 레스토랑을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입구는 이렇습니다. 유럽 최초의 대중시설 회전문이라고 합니다. '세계 최초'라 하지 않는 걸로 보아 유럽보다 먼저 존재했던 곳이 있는 모양입니다.
<길버트 스콧 바>와 <길버트 스콧 레스토랑>의 'Chef Patron'인 마커스 웨어링.
실례를 무릅쓰고 스마트폰으로 레스토랑 일부를 (몰래 후다닥) 찍어 봅니다. 분위기는 대략 이렇습니다. 정교하게 잘 꾸몄지만 천장이 높아 답답하지가 않고 시원스럽습니다. 저기 오른쪽 그림 밑에 피아니스트가 업라이트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서버 두 사람이 가렸습니다. 칠십은 족히 넘어 보이는 노인이 재즈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근사한 조명등.
빅토리아 시대에 지어진 건물이라 인테리어도 그 시대 것으로 맞췄다고 들었습니다. 이 조명등도 빅토리아풍으로 맞춘 게 아닐까 싶네요.
일요일이므로 두 사람 중 한 명은 선데이 로스트를 주문했고,
한 사람은 단품 요리들로 3-코스를 주문했습니다.
스파클링 미네랄 워터도 주문.
▲ 회향 씨를 넣은 식전빵Fennel seed bread
회향 씨를 넣은 식전빵이 마늘장아찌처럼 모양낸 버터와 함께 나왔습니다. 회향 씨를 좀 더 넣어 향을 과감하게 표현했어도 좋았을 뻔했습니다. 제가 아니씨드aniseed 계통 향을 좋아하거든요. 그런데, 선데이 로스트 먹을 사람한테는 사실 빵 안 줘도 됩니다. 로스트 비프에 감자와 요크셔 푸딩이 나오니까요. 일찍 배가 찰까봐 반쪽만 뜯어 맛보았습니다.
▲ Starter ① torched mackerel, smoked eel,
red cabbage slaw, chervil
다쓰베이더의 전식으로는 양념 촛물에 절인 뒤 토치로 껍질쪽만 그을린 고등어. 훈제 장어, 적양배추 슬로, 처빌이 곁들여 나왔습니다. 영국에서는 바싹 구운 생선을 보기 힘듭니다. 생선을 참 촉촉하게 잘들 익혀서 먹는 것 같아요. 심지어 노동자 계급working class 길거리 음식인 피쉬 앤 칩스의 생선 튀김 조차도 살이 항상 촉촉합니다. 고등어에 곁들인 저 훈제 장어도 딱 알맞게 익혔고 섬세한 훈향이 일품이었습니다. 참고로, 영국에서 훈제 장어는 훈제 연어보다 비쌉니다.
▲ Starter ② Dorset crab, heritage radish,
smoked almond, pink grapefruit
제가 시킨 전식은 잉글랜드 남부의 도싯 앞바다에서 잡은 게brown crab 요리입니다.
☞ 도싯 크랩
래디쉬 밑에 게 다릿살인 'white meat'를 한가득 깔았고, 농후한 맛의 몸통살'brown meat'로는 소스를 만들어 방울방울 짜 올렸습니다. 영국에서는 게살을 늘 이런 식으로 구분해서 씁니다. 수퍼마켓에서도 브라운 미트와 화이트 미트를 따로따로 팝니다. 살을 발라 냈다고 인건비가 추가돼 한 마리를 통째로 사는 것보다 비쌉니다.
래디쉬를 들추니 게 다릿살이 한가득.
남이 발라 준 게살처럼 호화로운 음식이 또 있을까요?
☞ 영국에 계신 분들은 집에서 '드레스트 크랩' 준비해 즐겨 보세요
영국인들은 게살에 과한 양념을 하지 않습니다. <마스터셰프 프로페셔날>을 시청하는데 출연자 한 명이 게살에 커리 양념을 했다가 탈락하는 장면이 있었죠. 요리를 못한 탓이 물론 가장 컸겠지만 심사평인즉슨, "섬세한 게살에 누가 이런 강한 양념을 하나?" 좋은 재료를 쓰는 파인 다이닝에서는 재료 맛을 너무 가리는 걸 꺼리는 듯합니다. 곁들이는 브라운 미트의 진한 맛으로도 충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아요.
▲ Main ① roast Aberdeen Angus beef,
Yorkshire pudding, red wine
선데이 로스트 메뉴 중 로스트 비프가 나왔습니다.
사진을 눌러 큰 사진으로 보세요.
구성은 대개 다음과 같습니다:
• 로스트 비프 저민 것
• 로스트 비프에 발라 먹는 호스래디쉬horseradish 크림
• 구운 채소 (로스트 포테이토는 필수, 나머지는 취향껏)
• 익힌 채소 (녹색 채소를 선호)
• 잘 부푼 큼직한 요크셔 푸딩
• 요크셔 푸딩과 로스트 비프에 끼얹는 그레이비gravy
• (로스트 비프에서 나온 육즙에 포도주를 섞어 만드는 갈색의 묽은 소스)
'푸딩'이라는 용어 때문에 한국의 언론들은 남의 나라의 신성한 대표 음식을 "한 접시 안에 디저트까지 다 담기는 풀 코스 요리"라는 헛소리로 묘사를 하곤 합니다. 원어민들은 푸딩, 치즈, 케이크 같은 용어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게 적용해서 씁니다. 비누 같은 고체 세정제나 여성들이 쓰는 고체 화장품을 케이크라 부를 때도 있죠. 번역할 때 그래서 주의해야 합니다. 조금만 찾아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텐데 최소한의 사실 관계도 확인 안 하고 기사들을 쓰는 겁니다. 기자들이 생각보다 게을러요.
☞ 요크셔 푸딩 만드는 법
☞ 로스트 포테이토 만드는 법
☞ 글레이즈드 캐롯 만드는 법
☞ BBC 설문 조사 - 영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 열 가지
왼쪽이 그레이비, 오른쪽이 호스래디쉬 크림입니다. 우리는 고기에 쌈장 곁들여 먹는 걸 좋아하죠. 영국인들은 겨자나 호스래디쉬 같은 알싸한 맛 소스 곁들이는 걸 좋아합니다. 중세 때는 밖에 나가 고기 먹을 경우를 대비해 아예 공 모양으로 빚은 머스타드 볼을 몸에 하나씩 지니고 돌아다녔다고 합니다.
크으...
이것이 바로 로스트 비프.
큰 덩어리로 로스트 한 뒤 저며서 제공합니다. 그레이비를 끼얹은 모습입니다. 영국인들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음식이므로 로스트 비프에 대해서는 글을 따로 써서 소개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참, 로스트 비프를 주문하실 때는 '미디엄'이나 '웰던' 말고 '레어' 혹은 '미디엄 레어'로 선택하시기를 권합니다. 다쓰 부처 둘 다 고기를 썩 즐기는 사람이 아니라서 고기 익힘 정도를 잘 몰라 이 날 낭패를 봤습니다. 서버가 주문 받으면서 선호하는 익힘 정도를 묻길래 무난할 것 같은 미디엄으로 시켰더니 좀 질겼어요. 덜 익히면 맛과 식감이 훨씬 좋았을 텐데요. 이렇게 손님이 무식할 경우가 많으니 ㅋ 좋은 고기를 낼 때는 손님한테 묻지 말고 주방에서 그냥 제왕적으로 알아서 익혀 내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야말로 '본고장' 아버딘 앵거스 비프였는데, 안타깝죠.
▲ Main ② mushroom Wellington,
kale, mushroom veloute
이건 제가 시킨 채식주의자용 본식입니다. 사진을 크게 키워서 보세요. 가족 구성원의 취향에 따라 대개는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 닭고기, 사슴고기 등을 즐기는데, 영국 인구의 무려 8분의 1이나 된다는 채식주의자들은 자국의 중요한 관습 중 하나인 선데이 로스트 시간에 과연 무얼 먹을지 궁금하시죠?
이들은 채소와 각종 견과류로 만든 ☞ 넛 로스트를 먹거나, 이렇게 채소와 향신료, 향채, 치즈 등으로 맛낸 버섯 요리들을 먹곤 합니다. 영국 살면서 가만 보니 채식주의자를 위한 본식이 재료비도 더 들고 품도 더 들고 더 고급이에요. ㅋ 또 다른 영국의 전통 음식인 비프 웰링턴beef wellington을 채식판으로 변주한 '머쉬룸 웰링턴'입니다.
버섯으로 맛낸 농후한 퓨레를 바닥에 멋지게 휘갈겼습니다. 버섯으로 만든 갈색의 그레이비도 있었는데 제가 끼얹고 나서 사진 찍는 걸 잊었습니다. 음식과 퓨레 사이에 갈색의 버섯 그레이비가 깔린다고 상상하시면 됩니다.
다시 봐도 한숨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먹어 본 버섯 요리 중 가장 맛있었습니다. 일요일 끼고 영국 여행 오실 분들은 <길버트 스콧> 레스토랑에 가셔서 한 분은 경험 삼아 선데이 로스트 메뉴에서 로스트 비프를 시키시고, 다른 분은 일반 메뉴에서 이 머쉬룸 웰링턴을 시키세요. (머쉬룸 웰링턴은 평일에도 제공합니다.)
한국에서도 밤양송이 버섯chestnut mushroom을 재배하고 있다는데, 유럽처럼 이렇게 크게 키워서도 출하시켰으면 좋겠습니다. 다양하게 활용할 수 있거든요. 파이 바닥에 깔린 게 바로 크게 키운 밤양송이 버섯인데, 작을 때는 오돌오돌 야무지게 씹히면서 고소한 맛이 나고, 크게 키운 것은 'meaty'하면서 우마미가 짙어 맛있습니다. 크게 키운 것은 '포토벨로 portobello'라고 아예 이름을 따로 붙여 부릅니다. 스테이크처럼 썰어 먹을 수 있어 채식주의자용 본식에 흔히 쓰입니다. 풀 잉글리쉬 브렉퍼스트 접시에서도 종종 볼 수 있습니다. 파이 바닥에는 포토벨로를 깔고 위에는 여러 종류의 버섯, 채소, 견과류, 향신료, 향초, 치즈 등을 혼합해 만든 소를 채운 듯합니다.
본식을 마치고 후식을 기다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선데이 런치 시간이라 확실히 가족들이 많이 보입니다.
여긴 조부모와 손자들로 보이고,
여긴 부모와 아들인 것 같고,
여긴 형제나 친구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온 것 같네요. 영국의 파인 다이닝 레스토랑에서는 여간해서 아이들을 보기 힘든데 선데이 로스트 시간만은 예외입니다. '선데이 로스트 = 흩어졌던 가족들이 일요일에 한데 모여 먹는 음식'이라는 고정관념이 있거든요. 이런 데 올 때는 보통 넥타이 없는 셔츠에 쟈킷을 걸친 '스마트 캐주얼' 정도는 입어 주어야 하는데, 가족들이 모여 선데이 로스트를 먹을 때는 복장 규정도 느슨해지나 봅니다. 다들 편한 평상복을 입고 왔네요. 스웨터(영국과 영연방에서는 '점퍼jumper'라고 부릅니다.) 차림의 남성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 Dessert ① Yorkshire rhubarb buttermilk cream, oats
후식이 나왔습니다.
루바브 철이라서 이맘때면 영국의 레스토랑들이 부지런히 루바브를 활용한 디저트를 냅니다.
☞ 색이 특별히 빨갛고 예쁜 영국의 요크셔 포스트 루바브
익히지 않고 진공으로sous vide 절이기만 했는지 루바브가 사각사각 경쾌하게 씹힙니다.
▲ Dessert ② pear and almond tart,
blackberry ripple ice cream
이건 영국의 전통 디저트인 베이크웰 타트bakewell tart입니다. 배가 제철이라서 얇게 저민 절인 배를 아몬드 밑에 깔았습니다. 타트 자체는 잘 만들어서 맛있었으나 배가 너무 불러 한 입만 찔끔 먹고 말았는데,
하, 참,
이러고 나면 꼭 블로그에 후기 쓸 때 남기고 온 음식이 생각 나 마음이 아프단 말이죠. 선데이 로스트는 양이 많으므로 씹는 디저트는 시키면 안 됩니다. 배불러서 맛있게 먹기 힘들어요. 크림이나 셔벗, 아이스크림 같은, 가급적 양 적고 녹아서 없어지는 디저트로 시키세요.
☞ 사과로 맛낸 베이크웰 타트
☞ 체리로 맛낸 베이크웰 타트
이 날은 영국 땅을 떠나기 이틀 전이었습니다. 고기도 잘 안 먹는 사람들이 마지막 일요일이라고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음식인 선데이 로스트를 주문했던 겁니다. 두고 온 영국 생각에 글 쓰면서 코 끝이 시큰합니다. ■
☞ 영국음식 열전
☞ <길버트 스콧 레스토랑>
☞ <마커스 앳 더 바클리>
☞ 마커스 웨어링이 자문한 음식 영화 <번트>
'영국 여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스러운 런던 (15) | 2023.12.17 |
---|---|
[런던여행] 빅토리아 알버트 뮤지엄의 철 공예품 Iron and Steel at the V&A (14) | 2022.11.10 |
단단, 런던 (20) | 2022.09.11 |
[영국여행] 잉글랜드 남부 햄프셔 州 빈티지 기차 여행 - 올스포드 워터크레스 라인 (14) | 2022.04.19 |
[런던여행] 로얄 칼리지 오브 뮤직 Royal College of Music (0) | 2016.11.02 |
[런던여행] 보로 마켓, 버러 마켓 Borough Market, London (13) | 2016.09.23 |
[런던여행] 폴렌 스트리트 소셜 Pollen Street Social (2) | 2016.09.22 |
굿 푸드 가이드 - 66년째 발행해 오고 있는 영국의 레스토랑 평가서 The Good Food Guide (0) | 2016.09.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