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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음식] 브라운 소스 Brown Sauce 본문
▲ 타마린드tamarind
오늘은 '브라운 소스' 이야기를 좀 해보겠습니다. 영국 소스 중 갈색 나는 소스는 많습니다. 무엇이 소스를 갈색 나게 만드는 걸까요?
① 얼마 전에 소개해 드린 ☞ 대추야자 열매나 타마린드[위 사진]처럼 재료 자체가 갈색을 띠어 결과물인 소스가 갈색이 되는 경우
② 양파나 버섯 등 밝은 색 나는 재료들이 오래 볶여 갈색으로 변색되는 경우
③ 갈색 기운이 희미하게 있는 소스를 한참 졸여reduction 농축시켰을 때 짙은 갈색이 나는 경우 등이 있지요.
프랑스인이 생각하는 브라운 소스와 영국인이 생각하는 브라운 소스가 좀 다릅니다. 프랑스인들은 '브라운 소스' 하면 아마 육수에 미르프와(mirepoix, 양파, 당근, 셀러리 다진 것)와 부케 가르니(bouquet garni, 향초 묶음)를 넣고 끓인 뒤 졸여서 만든 데미-글라스(demi-glace, 'half-glaze'라는 뜻) 소스를 떠올릴 겁니다.
▲ 그레이비를 끼얹은 로스트 비프.
접시 바닥에 그레이비가 고여 있다.
영국의 브라운 소스는 다음의 셋으로 나뉩니다.
① 육수나 채수를 바탕으로 만드는 그레이비gravy 계통
② ☞ 우스터셔 소스나 ☞ 머쉬룸 케첩 같은 점성 없는 액상 소스
③ 단맛 나는 과채와 식초로 만드는 새콤달콤한 퓨레 형태의 소스
셋 다 고기용이나 파이용으로 많이 쓰이는데, ③은 간혹 감자튀김 먹을 때 케첩처럼 찍어 먹기도 합니다. ①의 그레이비는 대개 로스트 디너나 소세지 요리를 위해 가정에서 직접 만들어 먹는 소스로 통하고, ②③은 수퍼마켓에서 사다 먹는 시판 소스로 통합니다. 집에서도 물론 만들어 먹을 수 있고요. 그레이비 중 양파를 써서 만드는 ☞ 어니언 그레이비와 크리스마스 만찬상에 오르는 ☞ 터키용 그레이비를 소개해 드린 적 있지요.
새콤달콤 퓨레 성상의 시판 브라운 소스 중 가장 잘 알려진 제품으로는 'HP Sauce'와 'A.1. Sauce'가 있습니다. HP 소스는 베이컨, 소세지, 블랙 푸딩 같은 돼지고기에 주로 곁들이고, A.1. 소스는 주로 쇠고기 스테이크에 곁들입니다. 그런데, 미국인들이 영국인들보다 스테이크를 더 많이 먹어서 그런지 A.1. 소스는 어째 미국인들이 더 좋아하는 것 같아요. 영국인들은 스테이크도 먹었다가 로스트 비프도 먹었다가 하니까요. 기름진 스테이크에는 느끼함을 잘 달래 줄 새콤달콤한 소스를, 살코기 맛이 좀 더 순수하게 드러나는 로스트 비프에는 그레이비와 알싸한 호스래디쉬horseradish 소스를 곁들입니다. 쇠고기에 머스타드를 곁들이는 것도 영국에서는 오랜 전통이고요.
이 두 브라운 소스들은 우스터셔 소스와도 닮은 데가 있으나, 우스터셔 소스 쪽이 성상은 묽어도 맛이 좀 더 농축돼 있습니다. 우스터셔 소스는 테이블 소스 역할보다는 조리시 음식에 활기를 더하는 조미료로 쓰일 때가 더 많고, HP 소스와 A.1. 소스는 테이블 소스로 쓰입니다. 세 소스의 성분을 적어 드릴 테니 한번 비교해 보세요. 공통 재료들도 있고 다른 재료들도 있어 성상, 점도, 맛 뉘앙스에 차이를 가져 옵니다.
우스터셔 소스 [영국 생산품의 경우]
Malt vinegar (from Barley), spirit vinegar, molasses, sugar, salt, anchovies (fish), tamarind extract (타마린드 모습은 위 사진 참고), onions, garlic, spice, flavourings (→ 영업 비밀인 듯). 끝.
HP 소스 [네덜란드 생산품의 경우]
Tomatoes, malt vinegar (from Barley), molasses, glucose-fructose syrup, spirit vinegar, sugar, dates, modified cornflour, rye flour, salt, spices, flavourings, tamarind. 끝.
A.1. 소스 [미국 생산품의 경우]
Tomato puree (water, tomato paste), vinegar, corn syrup, salt, raisin paste, crushed orange puree, spice, dried garlic, caramel color, dried onions, potassium sorbate (to preserve freshness), xanthan gum, celery seed. 끝.
▲ 호텔 조식 식탁 위의 양념condiment과 장sauce.
브라운 소스가 보인다. 2017년 2월
<프리미어 인> 호텔 런던 워털루 지점.
영국의 (저렴한) 식당과 (저렴한) 호텔 조식에서 볼 수 있는 HP 소스입니다. "시장 점유율이 가장 높은 제품이 반드시 가장 맛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말, 제가 이 블로그에서 누차 해오고 있죠. 영국에서는 이 소스가 바로 그 전형적인 예가 되겠습니다. 이 제품이 브라운 소스 중 현재 영국에서 가장 많이 팔리고 있는데, 우리 한국 동포 여러분, 유학생 여러분, 절대 사지 마십시오. 미각도 버리고 영혼도 좀먹힙니다. 값도 무지 싸고 맛도 형편없어요. '정직한' 소스랄까요. 돈값을 합니다. ㅋ 영업집들은 싼 걸 갖다 놓기 마련이니 영업집에서 많이 보인다고 '맛있는 건가 보다' 착각하시면 안 됩니다. 영국의 돼지고기와 감자튀김용 브라운 소스가 궁금하신 분들은 이 HP 소스말고,
이런 미식가용 잘 만든 브라운 소스를 사 드세요. 그래봤자 320g 한 병에 £2.99 밖에 안 합니다. 100g당 93.4p. (HP 소스는 대략 이 제품의 반값.) 값 차이는 두 배가 나지만 맛은 몇 배나 좋고요. 단맛을 비정제 사탕수수 설탕, 흑당밀, 대추야자 열매 퓨레로 내고 있어 깊고 풍부한 맛이 납니다. 영국 와서 'unrefined raw cane sugar'와 'black treacle'에 맛들였어요. 영국 제과와 디저트에 많이 쓰이죠. 성분을 옮겨 적습니다.
<스토우크스> 브라운 소스 [영국산]
Malt vinegar (from Barley), unrefined raw cane sugar, tomato puree, date puree (9%) (dates, water), black treacle (8%), cornflour, seasoning (coriander, ginger, clove, cinnamon, pepper, cayenne pepper), sea salt,
preservative: sorbic acid. 끝.
경쾌하고 짜릿한 신맛 때문에 토마토 케첩과 비슷한 느낌이 있기는 한데, 비정제 사탕수수 설탕과 흑당밀, 대추야자 열매 덕에 토마토 케첩보다는 좀 더 '웅숭깊은' 맛이 납니다. 맛없다는 저 HP 소스의 재료와 겹치는 재료들이 있다는 사실이 놀랍죠? 가공식품에서는 성분만 중요한 게 아니라 함량도 중요합니다. 재료 옆에 숫자로 굳이 함량을 밝힌 이유가 있는 거죠. "우린 맛내는 (비싼) 핵심 재료를 많이 쓴다고."
이 제품은 제가 맛을 못 보고 귀국했는데, 성분을 보니 감귤류, 건포도, 사과를 쓰고 있어 향기롭고 이것도 맛 괜찮을 것 같아요. 언젠가 영국 여행을 다시 가게 되면 사서 맛보렵니다.
<윌킨 앤 선즈> 브라운 소스 [영국산]
Tomatoes, sugar, treacle, barley malt vinegar, wine vinegar, apples, sultanas, oranges, citrus fibre, salt, tamarind, lemon juice, spices. 끝.
이것도 맛을 못 보고 왔는데 성분 보니 맛있을 것 같습니다. 잘 만든 브라운 소스도 종류별로 사서 비교시식하고 왔어야 했는데, 영국에서는 맛볼 게 줄을 서 있어 귀국 전 브라운 소스까지는 순서가 안 오더라고요.
<트래클먼츠> 브라운 소스 [영국산]
Tomato purée (37%), raw cane sugar, cider vinegar, soy sauce (water, soybeans, salt, wheat flour), onions, dates, tamarind paste, garlic, chillies, sea salt, concentrated lemon juice. 끝.
▲ 브라운 소스를 곁들인 블랙 푸딩.
위에 열거한 시판 브라운 소스들은 사진에 있는 식으로 활용하시면 됩니다. 돼지고기 중 지방이 많은 부위, 지방을 포함시켜 만든 소세지, 기름에 부친 ☞ 블랙 푸딩[사진], 빵가루 입혀 튀긴 돼지고기 등에 곁들이고, 감자 튀김에도 케첩처럼 곁들이곤 합니다. 새콤달콤해서 느끼한 음식에 잘 어울리거든요. 풀 잉글리쉬 브렉퍼스트에도 기름진 돼지고기(블랙 푸딩, 베이컨, 소세지)가 들어가므로 영업집들이 브라운 소스를 필수로 상에 놓아 두곤 합니다. 햄버거에 케첩 대신 브라운 소스를 쳐서 먹는 사람들도 많고요.
▲ 네 가지 다른 방식으로 조리한 영국식 돼지고기
플라터platter. 사과편 옆에 브라운 소스가 보인다.
[사진을 누르면 큰 사진이 뜹니다.]
영국인들이 돼지고기 먹을 때 곁들이는 소스는 또 다음과 같이 나뉩니다.
① 기름진 돼지고기: 브라운 소스
② 덜 기름진 돼지고기: 버터에 튀긴 세이지sage 잎과 사과 조림, 혹은 애플 소스
③ 구운 햄: ☞ 피칼릴리, ☞ 파슬리 소스, ☞ 브레드 소스
④ 포크 파이: 피칼릴리(일상), 반건조 살구 조림(크리스마스), ☞ 크랜베리 조림(크리스마스)
⑤ 소세지: 어니언 그레이비, 혹은 조제 머스타드
(참고로, 양고기에는 민트 소스.)
▲ 피칼릴리를 곁들인 햄.
▲ 버터에 튀긴 세이지 잎과 조린 사과를 곁들인 포크 촙.
▲ 애플 소스를 곁들인 포크 롤리폽.
동글동글한 튀김 볼은 돼지껍질.
롤리폽에 애플 소스를 묻힌 뒤 굴려 준다.
▲ 조린 크랜베리를 올린 포크 파이.
한국에서는 영국음식과 식품에 대한 지독한 편견 때문에 저 잘 만든 영국 브라운 소스들을 취급하지 않는데, 그래도 미국을 통해 A.1. 소스는 마트와 백화점에 들어와 있으니 그거라도 사다 놓아야겠습니다. 원래 영국 소스인데 미국 회사에 팔려 지금은 미국이 제조합니다. 일본의 돈카츠 소스도 영국의 돼지고기용 브라운 소스가 건너간 거라고 보시면 됩니다. '우스타 소스'라고 이름이 잘못 붙어 불리기도 하던데, 영국의 오리지날 우스터셔 소스와는 재료, 성상, 맛, 용도, 모두 다릅니다. 우스터셔 소스보다는 오늘 소개해 드린 돼지고기용 브라운 소스에 더 가깝죠.
집에서 만들어 드실 분들을 위해 레서피를 적어 드립니다. 위의 시판 브라운 소스들 성분을 살펴보시고 취향에 따라 토마토 퓨레나 감귤류를 추가하셔도 되겠습니다. 영국인들은 신 음식을 좋아하고 식초 맛을 좋아해 때로는 두어 종류의 식초를 섞어 원하는 맛을 내기도 합니다. 설탕도, 식초도, 홍차처럼 블렌딩해서 쓴다는 걸 알고 재미있어 했죠. 신 음식과 피클 좋아하는 단단은 영국에서 신맛을 원없이 즐기다 왔습니다.
브라운 소스
[영국 펍 음식으로 미슐랑 2-스타를 받은 톰 케리지Tom Kerridge의 레서피]
재료
• 씨 뺀 반건조 대추야자 열매pitted dates 250g 잘게 썰기
• 조리용 녹색 신 사과Granny Smith나 Bramley 2개
• 올스파이스allspice 간 것 1/4작은술 [1작은술 = 5ml]
• 생강 가루 1/4작은술
• 넛멕nutmeg 즉석에서 간 것 1/4작은술
• 소프트 다크 브라운 슈가 200g
• 카버네 소비뇽 비니거Cabernet Sauvignon vinegar 150ml
• 레드 와인 비니거 150ml
만들기
1. 내열 그릇에 씨 뺀 대추를 담는다.
2. 껍질 깐 사과는 1에 대고 강판에 굵게 갈아 넣는다.
3. 향신료를 2에 합쳐 잘 섞는다.
4. 냄비saucepan에 설탕과 식초 두 가지를 넣고 강불에 올려 끓인다boil. 설탕이 잘 녹을 수 있도록 간간히 저어 준다.
5. 4를 3에 붓고 잘 버무린 뒤 랩cling film으로 덮어 실온에서 천천히 식도록 둔다. 대추가 액체를 흡수해 부드러워질 것이다.
6. 바닥이 두툼한 냄비saucepan에 5를 담고 낮은 온도의 불에서 얌전히 끓인다simmer. 눋지 않도록 가끔씩 저어 준다. 약 1시간 반 정도 소요될 것이다. 부드러운 펄프가 될 때까지 끓이면 된다.
7. 블렌더에 넣고 곱게 간 뒤 체에 한 번 거른다. 냄비에 넣고 살짝 가열한 다음 열탕 소독한 병에 담아 밀봉한다. 약 두 달 정도 보관 가능하다. 끝.
마지막 줄에 "약 두 달 정도 보관 가능하다."라고 썼으나, 6개월 정도 묵혀야 맛이 제대로 나기 시작하고 일년쯤 돼야 정말 맛있어진다고 하네요. 그 말인즉슨, 브라운 소스는 그냥 잘 만든 것을 사 드시는 게 낫다는 거. ㅋ ■
☞ 영국음식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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