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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담동 권숙수 본문
단단이 생일을 맞았어요.
나이 먹는 거 너무 슬퍼서 생일 앞뒤로 2주씩, 즉, 6월 한달 동안 사생결단하고 잘 먹고 잘 놀기로 했으니 말리지 말아 주세요.
권숙수에 생일밥 먹으러 왔습니다. 외식 잘 안 하는 단단은 그저 그런 식당과 커피숍에서 15,000원 쓰고 그저 그런 음식을 먹느니 열 번 참았다가 이런 집에 오기로 했습니다. 내 집에서 먹는 음식보다 맛이 좋든, 재료가 좋든, 그릇이 좋든, 뭐 하나라도 나은 점이 있어야 외식하는 의의가 있지 않겠습니까.
기대가 됩니다.
권여사님이 이 집 음식을 아주 좋아하시는데, 드시면서
"권씨들이 원래 요리를 쫌 잘해."
본인이 우쭐해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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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집의 특징 - 옛날식으로 독상 소반을 씁니다. 마음에 들어요.
제가 한식에서 가장 싫어하는 부분이 바로 '공용 반찬'이거든요.
동절기에는 따뜻하게, 하절기에는 차게 해서 내는 물수건.
그렇죠. 제대로 된 한식당이면 장, 김치, 식초, 장아찌 전부 직접 만들어야죠.
독상에 대한 언급이 있습니다.
양이 많으니 추가 메뉴는 전부 배제하고 기본 메뉴로만 먹겠습니다.
이날 이 집에서 점심을 먹기 위해 전날, 당일, 그 다음날, 3일간 한 끼만 먹었습니다.
주안상 - 우리 술과 6종 한입거리
Welcome Drink with Small Appetiz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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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해서 크게 띄워 놓고 찬찬히 살펴보세요.
시작부터 호사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원래 서양에서도 식전주인 아페리티프apéritif와, 아뮤즈부쉬amuse-bouche, 애피타이저appetizer, 스타터starter라고, 짭짤한 한입거리 작은 음식들을 제공하게 돼 있는데, 그걸 여기서는 주안상이라고 부르는 거죠.
차림새가 훌륭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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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상 왼쪽에 있는 것들부터 -
• 씨간장을 곁들인 한우족편
• 들기름마요네즈를 곁들인 사슴육포
• 소고기우둔살과 표고를 끼운 순무선에 무청오일소스
• 코코넛참외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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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안상 오른쪽에 있던 것들 -
• 두부, 닭고기, 오이로 속을 채우고 김을 올린 메밀전병
• 고추장 뱅어포
• 문어숙회
"6종"이라더니, 일곱 가지가 올라온걸요?
코코넛참외주스는 단맛 난다고 가짓수에 포함시키지 않은 모양입니다.
다 맛있었어요. 식감도 다채롭고 향도 좋고요.
사진 올리면서 정성이 얼마나 많이 들어갔는지 다시 한 번 헤아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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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마시지 않으므로 대체음료로 주문했습니다.
이날은 하동매실주스가 나왔습니다.
술병 술잔의 곡선과 매화문 좀 보세요.
'오너 셰프'인 권우중 주방장이 직접 디자인해 광주요 측에 제작 의뢰한 작품이랍니다.
이 분의 외조부께서 유명한 이북식당의 오너 셰프셨고, 부친은 미술쪽에서 일하셨다고 합니다.
500년의 무만두
Dumpling, Radish, Korean Beef, Dubu, Pinenut Ju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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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盒 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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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유처럼 뽀얀 잣물을 부어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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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 한우, 두부로 빚은 피皮 없는 만두 위에 석이버섯채와 갖은 고명.
500년 된 어느 종가 레서피를 재해석했다고 합니다.
저한테는 사실 어떤 음식이 유구한 전통을 가졌다는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고 맛만 좋으면 장땡이나
'스토리텔링'거리가 있으면 감상자(식객)의 기억에 좀 더 깊게, 오래 각인시킬 수 있지요.
작품(음식)에 애착도 더 생길 수 있고요.
진하고, 고소하고, 식감 좋고, 합에 담겨 있으니 기분 좋고.
남해 바다
Raw Fish, Sea Squirt, Seaweed, Bang-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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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 또.
"남해 바다"라고 파란색 합을 채택한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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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돔회 위에 멍게젓, 그 위에 가늘게 채썬 방아잎과 감태 파우더, 주변의 하얀 것은 참기름 파우더.
평소 액젓은 사용해도 씹는 젓갈이나 회 같은 날해산물은 안 먹으려 드는데 잘한다는 집이니 눈 질끈 감고 먹습니다. 바다향이 강하지만 기분 좋게 나고 감성돔 식감은 부드러우면서도 오돌오돌, 좋네요. 저는 면역력이 시원찮아 날해산물을 삼갈 뿐이지, 사람들이 왜 회를 즐기는지는 이유를 압니다. 맛이 생생하고 식감이 좋더라고요.
여기 주방이 우리 전통 유지인 들기름과 참기름을 고집해서 재미있었습니다. 들기름 마요네즈, 참기름 파우더, 들기름 막걸리 소스, 전복용 참깨 소스 등, 이 두 유지를 변형시켜 내는 일이 많으니 눈여겨보세요.
민어구이
Pan Fried Croaker, Venus Clam Porridge, Beach Silverto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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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번째 합.
여름 생선인 민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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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어는 먼저 찐 다음 가볍게 지졌고, 백합으로 맛낸 죽과 함께 담았습니다. 바닷가에서 자라는 해방풍나물을 곁들이고 사랑초꽃 한 송이로 마무리했고요. 다쓰베이더는 서버의 설명 듣고 재료 적느라 정신 없고, 저는 사진 찍느라 정신 없고. 이것도 맛있었어요. 백합죽은 강한 우마미에 짭짤하니 고소하면서 찰지고, 불맛 나는 민어는 한 입 깨무니 녹아내립니다.
민들레 국수
Dandelion leaf, Perilla oil, Noodle, Smoked Praw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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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너춰'인 민들레 국수.
크게 띄워 놓고 보세요. 담음새가 예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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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단단한 식감과 색을 위해 우리 소면 대신 스파게티 중 가장 가는 카펠리니cappellini를 쓰고, 들기름과 막걸리 식초로 만든 소스를 넉넉히 담아 냅니다. 사과나무로 훈제한 홍새우를 납작하게 반 갈라 얹었습니다.
국수 그릇에 부어 섞어 먹어야 하는 민들레 샐러드는 까나리액젓과 매실청으로 버무려 담았습니다. 모친이 자주 해주시던 토종고수무침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담은 것 좀 보세요. 일류 꽃꽂이입니다. 주방에 쫓아 들어가 카펠리니 야무지게 돌돌 말아 담은 분과 민들레 샐러드 담은 분 뵙고 칭찬하고 싶은 마음 굴뚝같았습니다. 샐러드는 핀셋 써서 정성껏 배치했겠죠. 저도 집에 플레이팅용 핀셋이 있어서 담음새를 눈여겨봅니다.
기름 고소한 맛에 새콤달콤하면서 면발은 적당히 힘이 있어 맛있게 먹었습니다. 이 집이 '들기름 국수' 맛집이네요. 일상 한식에서 국수가 차지하는 비중이 큰 데다 면 좋아하는 이들이 많으니 파인 다이닝 코스에 국수를 넣는 건 잘 하는 거지요. 여기 음식이 다 맛있는데 일행 모두 이 민들레 국수와 디저트를 그중 가장 기억 나는 권숙수 음식으로 꼽았습니다.
전복구이와 토종 참깨소스
Pan Fried Abalone with Kelp, Korean Sesame Sau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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깻잎 동그랗게 찍어 올린 것 좀 보세요. 향미가 강한 향초니 모양틀로 작게 찍어 올린 겁니다. 채썬 향초들은 앞에서 이미 여러 번 봤으니까요.
깻잎 바로 밑에는 간장에 조린 다시마채, 그 밑에는 술찜한 뒤 기름에 지진 전복, 죽순의 일종인 '분죽'을 귀하다는 연천 참깨로 소스를 만들어 버무린 뒤 깔았습니다.
제가 "전복은 질기기만 하지, 자체의 개성 있는 맛도 없고, 우마미도 부족하고,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모르겠다."고 투덜거린 적 있죠. 이날 이 집에서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부드럽게 씹히도록 조리하기가 힘든가 보죠? 다들 이 집처럼 잘 조리해서 내면 얼마나 좋을까요? 다른 조개류(실은 달팽이류라 함.)에 비해 맛이 부족한 건 맞으니 양념을 잘해야 하는데 술향이 배도록 살짝 익히니 좋네요. 영국에 갔다 오니 전복이 흔해져서 이제는 어느 한식당이든 전복을 내지만 잘하는 집이 없어 물려하던 참에 구세주 같은 접시를 만났습니다. 감사.
소르베 - 입가심
Sorbet - Palette Cleanser
본식 전에 입가심 하라고 내준 소르베입니다.
2019년에 직접 담근 청귤 식초와 샤인 머스켓을 쓰고 앙증맞게 타임thyme을 한 잎 따서 얹었습니다.
메뉴에도 안 적혀 있는 별것 아닌 소르베조차 훌륭히 맛냈습니다.
홍합솥밥과 한우 떡갈비 제철 반상
Mussel Pot Rice, Korean Beef Tteokgalbi, Banc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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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성된 홍합 솥밥을 밥그릇에 덜기 전에 보여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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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깨와 쪽파를 얹은 홍합무나물솥밥에 새우근대된장국.
솥밥 훌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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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찬은
• 제피 장아찌
• 유자더덕초무침
• 오이지무침
• 소고기 표고 장조림
• 총각김치 (김치 이름 웃겨 죽것어요. ☞ 숫총각버섯도요. 짓궂은 한국의 아지매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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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먹고 싶은 반찬 있냐고 서버가 물어 봐 줍니다.
유자 더덕을 더 달라고 했습니다.
솥밥은 반찬이 많지 않아도 되지요. 밥, 국, 반찬, 다 맛있었습니다.
맨 오른쪽에 찔끔 담긴 것은 우리나라에서도 나는 '제피'인데, 제피뿐 아니라 딜dill과 딜꽃도 즐겨 쓰는 걸 보니 여기 주방이 저처럼 아니씨드anise, aniseed 계열의 향신료와 향초를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적은 양으로도 입맛과 기분을 돋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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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에 떡갈비 작은 것 한 조각이 곁들여집니다. 백김치, 시래기, 표고조림, 청경채가 같이 놓입니다. 메뉴에 "그 유명한 한우 떡갈비"라고 써 있어서 웃었습니다. 네에, 과연 세련된 맛이 나면서 아주 맛있었습니다.
청경채에서 신기한 맛이 나 '무슨 짓을 한 거냐' 물었더니 볶을 때 문배주를 같이 썼답니다. 눌은 단맛과 기분 좋은 향이 은은히 납니다. 맛있어서 저도 앞으로 청경채는 뿌리쪽만 살짝 데친 다음 기름과 맛있는 술로 플랑베flambé 해 볶아 먹기로 했습니다.
이 코스는 밥과 반찬 없이 좀 더 실한 크기의 고기 요리로 대체할 수도 있는데, 저는 한 번에 많은 양의 고기는 잘 먹지 못 하므로 떡갈비 반상으로 선택했습니다. 이 집에서 양갈비 고추장 구이와 한우 채끝 구이를 본식으로 선택해 맛본 적 있습니다만, 저한테는 솥밥에 국과 반찬 이것저것 나오는 이 떡갈비 반상이 가장 나았습니다. 눈도 즐겁고 입도 즐겁고요.
청명호
CheongMyeongju, Sliced Canded Ginger, Yogert, Applemint, Oriental Me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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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디저트.
레몬 요거트 아이스크림에 사각사각 생강 소르베와 참외 콤포트, 그리고 레몬생강 파우더,
투명한 생강칩 위에 청명주 젤리, 물망초와 딜꽃.
저 나이 적지 않은데 지금까지 고급 식당에서 맛본 디저트 중 이게 가장 훌륭했습니다.
맛 진하고 향기롭고 식감도 다채롭습니다.
맨 위의 생강칩은 맛폭탄이면서 얇고 바삭하게 잘도 만들었어요.
요리도 다 훌륭하고 디저트까지 잘 만들고, 이 집 뭔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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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서 본 모습.
다과상의 과자를 집어먹을 때가 되어 물수건을 다시 제공.
다과 카트와 커피 또는 차
Petits Fours Trolley with Coffe or T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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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오.
차음식 수레가 우리 식탁으로 왔습니다.
고르는 게 아니라 여기 있는 걸 하나씩 다 준답니다.
신난다.
• 깨물면 조청과 생강즙청이 '쭈아악' 배어 나오는 막걸리맛의 한국식 도넛 개성주악
• 생강으로 맛내고 백년초로 색을 낸 매작과
• 망고 타트
• 얼 그레이 찻잎을 넣고 구운 뒤 얼 그레이 크림을 충전한 프리앙friand
• 오미자와 자몽으로 맛낸 '오미자몽' 젤리
영감은 애플민트 인퓨전을, 저는 녹차에 곁들여 먹었습니다.
아니? 이 집 뭔가요?
차음식도 일류 한과집들 것보다 훨씬 나은데요?
아프터눈 티 전문점 차려도 되겠습니다.
총평
살면서 지금까지 경험해 본 파인 다이닝 음식 중 이 집 음식이 다쓰 부처한테는 으뜸입니다.
'맛잘알'도 이런 맛잘알이 없어요. 한국에 이런 실력자가 있었다니요.
한식 재료들을 뚝심 있게 쓰면서
재료들 간의 맛 궁합과 식감 조화를 훌륭히 이루어 내는데,
주재료를 주재료 농축액에 담갔다 쓰는지 재료의 맛과 향이 강하고 생생합니다.
인상적입니다. 저 먹고 나면 맛 금방 까먹는데 이 집 음식은 기억이 오래 남습니다.
(→ '슴슴'하고 '담백'한 파인 다이닝 한식 넌더리내는 단단)
동물성 재료들은 다들 어찌나 잘 익혔는지 보들보들 야들야들 살살 촉촉, 관능적.
어느 코스 하나 처지지 않고 다 뛰어나 다 '시그너춰' 삼아도 되겠고
심지어 마지막 다과상까지 훌륭합니다.
한식을 이렇게 낸다면 단단은 한식을 중식보다 더 좋아할 수 있겠습니다.
서버들도 훈련이 잘 돼 있어서 제가 재료와 조리에 대해 이것저것 많이 묻는데도 마치 그 음식을 만든 당사자인 양 설명을 구체적으로 잘해 줍니다. 질문을 하면 보통은 "주방에 가서 물어 보고 오겠습니다." 하거든요. 손님의 필요를 살펴 그때그때 재빠르게 제공해 주기도 하고요.
두 번째 방문인데, 두 번 다 일행 모두 만족스러워했습니다.
'권숙수 적금' 들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와야겠습니다.
아, 예약하기 힘든 집이라서 블로그에 막 이렇게 칭찬하면 안 되는데. ■
서울의 고급 한식당
☞ 원서동 한식공간
☞ 잠실 롯데 타워 81층 비채나 - 광주요 그릇 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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